찰스다윈은 영국의 박물학자이며 철학자로 인정받기도 했으며 생물학자이자 지질학자로서, 진화론에 가장 크게 기여했다고 알려져 있다. 다윈은 생물의 모든 종이 공통의 조상으로부터 이어졌다고 보고,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와의 공동 논문에서 인위적인 선택인 선택적인 교배와 비슷한 현상이 생존경쟁을 거쳐 이루어지는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을 소개했다. 박물학자 이래즈머스 다윈의 손자이며, 생물학자 프랜시스 골튼의 외사촌 형이기도 하다. 다윈은 종의 진화 개념 이전에의 과학의 거부반응을 극복하고 1859년에 저술한 《종의 기원》에 강력한 증거로 진화론을 발표했다. 생명 과학의 통합 이론으로 자연선택이 진화의 기본 메커니즘이라는 다윈의 과학적 발견이 생명의 다양성과 관련된 많은 설명을 할 수 있어 1870년대에 과학계와 많은 대중이 진화를 사실로 받아들였다. 1930년대에서 1950년대에까지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된 이후 현대 진화론에 이르기까지 경쟁 이론은 나오지 않았다. 수정된 내용에서는, 《종의 기원》에서 당시 지배적이었던 창조설, 지구상의 모든 생물체는 신의 뜻에 의해 창조되고 지배된다는 신중심주의 학설을 뒤집고 생물의 진화론을 내세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만큼이나 세상을 놀라게 했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 인류의 자연 및 정신문명에 커다란 발전을 가져오게 했다. 로잔대학의 다니엘 셰릭 교수는 '다윈은 사람과(科)에 속한 두 종(種)이 서로 연관이 있으며, 이들이 공동의 조상을 가졌던 시기가 있었다고 말했다'는 언급을 한 바 있다. 다윈의 이러한 발언은 당시 유럽 사회에 충격을 주었을 것이며 그 당시 진화론과 창조설 간의 논쟁에 본격적으로 불을 붙였다고 알려져 있다. 찰스 다윈은 1809년 2월 12일 영국 슈루즈베리(Shrewsbury)에서 부유한 의사 로버트 워링 다윈과 어머니 수잔 사이에서 2남 4녀 중 다섯째 아이이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이래즈머스 다윈은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진보 지식인으로 이름이 난 의사였다. 외할아버지는 영국 도자기 산업의 창시자이며, 도예가이자 기업가인 조시아 웨지우드였다. 할아버지들은 박물학자이며, 아버지 로버트와 어머니 수잔의 동생인 외삼촌은 모두 사업가로 다윈 가족과 웨지우드 가족은 모두 오랫동안 친밀하였고, 그의 부모님과 더불어 몇 쌍의 겹 결혼으로 인해 친한 인척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 수잔이 다윈이 8세 때 생을 마감하고, 누나인 캐롤라인 등 3명의 누이가 어머니를 대신하여 다윈을 길렀다. 아버지 로버트는 아내의 죽음에 성격이 엄격해졌지만, 아이들이 혹시 비뚤어질까 봐서 심하게 꾸짖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집안의 가풍은 다윈이 어진 성품과 당시로선 자유로운 성공회 믿음을 가지게 하였다. 웨지우드의 가문은 다윈의 탄생 당시 이미 종교개혁으로 영국의 전통교회로 뿌리내린 성공회를 받아들였지만, 양가 모두 원래는 하느님으로서의 예수보다는 사람으로서의 예수에 무게를 두는 반(反) 삼위일체 기독교 교회인 유니테리언 교회의 신도였다. 다윈 가는 휘그당의 급진자유주의에 뜻을 같이하고 있었다. 이렇듯 다윈의 집안은 자유주의가 전통인 집안이었으나, 아버지 로버트는 관례에 따라 아이들에게 성공회에서 세례를 받게 했다. 그러나 다윈 남매와 어머니는 유니테리언 교회에 갔다. 어린 시절부터 박물학적인 취미를 좋아하고, 8세 때 식물, 조개, 광물 수집하는 취미를 가지게 되었다. 아버지 로버트는 할아버지와 달리 박물학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꽃과 나무를 가꾸는 일인 원예가 취미였기 때문에 어린 다윈은 자신의 작은 정원을 가졌다. 또한, 할아버지와 같은 이름의 형 에라스머스는 화학 실험에 몰두했고 다윈에게 실험을 돕게 했다. 다윈은 형을 라즈라고 부르면서 그리워했다. 1817년부터 1825년까지 다윈은 초중등 교육을 받았으며 할아버지 에라스무스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어려서부터 할아버지가 쓴 책들을 읽으면서 생물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된다. 초등학교 시절 다윈은 교사에게서 '항상 멍하게 있는 녀석'이라는 심한 욕을 듣기도 했다는데 그 이유는 교육을 지식전수로만 여기며 학생들의 좋은 점들을 존중하고 키워주지 않는 잘못된 교육 때문에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818년, 다윈은 슈루즈버리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과학에 큰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찰스 다윈은 형인 이래즈머스 다윈과 함께 학교 정원에 화학 실험실까지 마련했다. 의사였던 아버지 로버트 다윈은 아들이 의사가 되기를 희망했고, 그를 의대로 진학시키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찰스는 청소년기 때부터 곤충 채집과 동물 관찰에 흥미를 보였고 의학에 별로 관심이 없어 아버지의 설득에 그는 별로 공감하지 않았다. 다윈은 1825년 16세 때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기 위해 부모 슬하를 떠나 에딘버러 대학교에서 의학을 배웠다. 그러나 피를 봐야 한다는 사실에 거부감을 가졌고, 의학보다는 곤충 채집 같은 경험에 입각한 자연계의 다양성을 좋아했다. 더구나 마취학이 없었던 19세기 유럽 의학의 수술은 환자들에게 고통을 주는 인도주의에 어긋나는 모습이었고 지나치게 학문에 치우친 의대 교수들의 지루한 강의에 친숙해지지 못한 다윈은 1827년에 에딘버러 대학교를 떠나게 된다.
'심리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화론 연구 (0) | 2022.09.07 |
---|---|
비글호 해양탐사 (0) | 2022.09.07 |
빈헬름 분트_심리학의 아버지 (0) | 2022.09.07 |
트라우마_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1) | 2022.09.07 |
칵테일 파티 효과 (0) | 2022.09.06 |
댓글